오병익 전 충북단재교육연수원장

[오병익 전 충북단재교육연수원장] 두 살 터울 손주가 다투다 /에미 눈에 딱 걸렸다. /"누가 잘못한 겨? /형아, 아니 동생이…/다시 한 번 묻겠어. /누가 혼날까? /저요. 아니 전 대요" /그렁그렁 달린 눈물을 닦아주며 형아가 더 크게 운다. /필자의 동시 '용서 연습 중'이다. 언어의 해이가 도(度)를 넘었다. 학교급식종사자 파업을 "미친X들"이라고 몰아붙인 국회의원이 혼쭐나고 있다.

최근 불거진 모 제약회사 회장은 운전기사에게 "주둥아리 닥쳐. 애비가 뭐하는 놈인데" 등, 인권유린을 밥 먹듯  자행해 왔다. "직장생활이 힘들면 농사나 짓고 살라"던 스타강사, 농민들에게 허탈감을 빚었다하여 장기간 강의 중단이 선고된 예도 있다. 개까지 견공(犬公) 존칭으로 예우하는 현실, 사회적 약자를 무시한 언사야말로 더욱 용서받기 힘들다. 정치인의 사용빈도수 최상위인 "기억 안 난다"는 거짓말 역시 혐의를 피하려는 방어 논리다. 가족 방송프로그램에서 조차 적합하지 않은 쌍욕을 섞으며 시시덕거린다. 정작 그럴 때 '주둥아리 놀린다'고 하잖는가. 그런대도 거름 장치는커녕 방송국마다 겹치기로 불러 오염 수위를 높이고 있다.

어디를 가나 말 많은 사람 천지다. 겨우 말을 배우기 시작한 유아들도 부모를 기절시킬 정도다. 어쩌면 그렇게 요상한 말을 토해낼 수 있을까? 그러나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중·고등학교에 들면서 언어가 자신의 과시 수단으로 감각마저 흔들릴 정도다. 욕설을 달고 사는 청소년들의 일상 언어를 들여다보면 아찔하다. 전문가들은 '청소년기 가정교육과 공교육이 일그러진 결과'로 분석한다.

물론, 양념 정도라면 생활의 필요악으로 넘길 수 있다. 스트레스 크기만큼 분출돼야하는 원리를 누가 모르랴. 그러나 막말이 순화된 우리말처럼 때와 장소, 사람 가리지 않고 뱉는 게 더 문제다.  '왕따, 학교폭력, 인성의 몰락' 등을 짚어보면 근원적으로 말의 일그러짐에서 비롯돼 마침내 상실의 늪에 빠지는 사례를 흔하게 접하지만 거기에 대항할 문화가 전혀 없다.  국어 교과서의 '선플 달기 운동'정도다.

 말은 희망과 좌절의 힘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언어를 넘어 일종의 행동이다. 다양한 실제 삶 속의 울림을 통해서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아무리  어떤 얘기를 하고 싶어도 때가 아니면 기다려야 한다. 공직자가 특히 분신처럼 챙겨야 할 덕목 아닌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누구를 위해 있는지. 무엇 때문에 존재 하는지' 정체성 있는 공복(公僕)의 경쟁력은 할 말과 해서는 안될 말을 선별하는 일부터다. 말머리를 이리저리 돌려 매우 능란하게 쏟아낸 임기달변(臨機達辯)보다 서툴러 숨을 몰아쉴지언정 마음으로 이야기하는 눌변(訥辯)이 훨씬 낫다.언어에 온기가 사라지고 있음의 징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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