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 충북여성문인협회장·수필가

[김혜경 충북여성문인협회장·수필가] 뭐가 좋아서 그리 기를 쓰고 떠나려 했을까. 빨랫줄 집게에 물려 끝자락만 흔들리고 있는 속옷을 접다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흘러간 노래를 듣는다. 너도 나도 배낭을 꾸리는 휴가철이 된 모양이다. 새벽부터 옆집은 우당탕거리며 온 가족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며칠 동네가 조용해질 것 같다. MT라는 말조차 없던 시절, 과별여행이나 서클 수련회를 갔었다. 하룻밤 단체로 자고 오는 건데도 왜 그리 많은 짐을 꾸렸는지. 누가 볼 것도 아닌데 속옷은 왜 사러 다니고 언니의 옷 한 벌 얻으려고 왜 그리 굴욕을 견디며 아양을 떨었는지.

 사내 녀석 한 둘은 꼭 잘 치지도 못하는 기타를 메고 왔고 통일호인지 비둘기호 열차는 왜 그리 수시로 연착을 했던 것인지. 한껏 멋을 내도 촌스럽기 그지없는 끼리끼리 모여 열차 바닥은 새우깡 봉지가 펼쳐지고 누군가 펑 소리가 나게 소주병을 따면 약속 없이도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을 합창하며 여행이 시작됐다.

 생계를 꾸려가기 위한 고통도 취업에 대한 걱정도 없던 시기였음에도 무엇 때문인지 밤 새워 고민을 하고 때론 삶이 너무 무겁다고 엄살을 떨었는지 모르겠다. 젊다는 것은 늘 고통에 숨넘어갈 만큼 힘든 것이 아니라 고통을 묵묵히 견딜 맷집이 없다는 것인 줄 이제 안다. 혼자서 비바람 치고 때 아닌 우박이라도 맞은 듯한 절망에 빠져 있다가도 순간 모든 것이 잔잔해 지면 성공도 사랑도 환희처럼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목이 쉬고 손바닥이 얼얼해 지도록 노래 부르고 나면 여행의 기대와 설렘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도 소리 들리는 바닷가에 별이 쏟아져 내리고 별빛에 물비늘 반짝이면 모닥불이 피워지고 또다시 '비바람이 치던 바다를' 불러야하고 돌돌 말린 스카프가 누구의 등 뒤에 떨어질까. 예쁜 아이는 수도 없이 일어나 수건을 돌려야하고 예쁘지 않은 아이들은 시들한 마음을 애써 웃음 뒤에 감춰야 했다. 잠자리에 들 시간, 우리는 수다 삼매에 빠져 있는데 예쁜 순영이는 어디로 갔을까.

 열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 본 적이 언제인가. 요즘은 친구들과의 여행도 승용차를 끌고 이동을 한다. 기타를 치는 사람도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없다. 그 차에 타지 않은 누군가를 열심히 씹고 뱉으며 휴게소에 들러 소주 대신 커다란 종이컵의 아메리카노커피를 한잔씩 마신다. 물론 설탕을 넣지 않아야 좀 더 세련되어 보인다.

 촌스런 나팔바지와 줄무늬 남방을 입고 다니던 친구들이 어느 결에 이렇게 우아와 격으로 치장을 한 것인지. 그녀들에게 이미 비바람은 사라지고 잔잔한 바다가 찾아온 것인지. 소주와 블랙커피 중 어느 것이 더 쓸까. 나는 지금까지도 블랙커피가 더 쓰게만 느껴진다.

 과거의 유물처럼 되어버린 그 노래들이 갑자기 배낭을 싸고 싶게 하고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보게 한다. 오늘 그대 오시려나 간절히 기다리던 수줍은 마음들도 꺼내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아들의 방에 장식처럼 서 있는 기타도 한줄 튕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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