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2주년 특집]손자 을용씨가 본 '윤인보 애국지사' 항일운동
청주 '미원장터' 만세 시위 주동하다 옥고
고문에 시력 잃어… 부인 삯바느질로 연명
"나라 위해 흘린 피 꼭 기억하면서 살아야"

 

[충청일보 박건기자] "허구한 날 일본 순사들이 찾아와 이유없이 할아버지를 잡아갔어요. 친일파들도 매일 할머니에게 욕을 했어요. 할아버지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늘 당당하셨어요. 매번 체포될 때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갔다 올게' 한 마디만 남기셨을 뿐."

조국 독립을 위해 항일운동을 하다 두 눈의 시력을 잃은 윤인보 애국지사(1878~1951)에 대한 손자 윤을용(77·충북 청주시 청원구 내덕동·사진)의 기억의 단편이다.

오는 15일 광복절 72주년을 앞두고 손자 윤씨의 기억을 통해 애국지사 윤인보씨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발자취를 따라가봤다. 

당시 유년 시절이었던 윤씨는 "정말 핍박을 많이 당하셨어요. 어린 마음에 '후회 안 해?'라고 물으면, 할아버지는 늘상 저의 머리를 쓰담으시며 '안 한다'라고 웃음을 보이셨어요. 입가에 깊게 주름이 질 정도로 짓는 그 웃음의 의미를 그 때는 몰랐어요. 참 대단하신 분이예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충북 청주시 미원면 출생인 윤인보 애국지사는 1919년 3월30일 오후 2시쯤 미원장터에서 군중 1000여 명을 규합, 독립만세 시위를 주동하고, 일본 헌병의 대검을 탈취하려는 등 항일운동을 추진하다 체포됐다. 당시 41세였다. 

같은 해 5월5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형무소에 갇혀 있던 내낸 모진 고문을 당했다. 몽둥이 매질은 매일 이어졌다. 고춧가루 풀은 물을 눈과 코에 들이부었다. 출감 때는 이미 두 눈의 시력을 잃은 상태였다.

집은 풍비박산이 났다. 처자식을 부양하기 위해 일감을 찾았지만 어느 누구 선뜻 두 눈이 먼 애국지사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부인의 삯바느질로 힘겹게 연명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본은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문화 말살정책을 펴던 암울한 시절인 탓에 태극기·서책 등 대한민국에 관련된 물품만 발견되면 그는 어김없이 끌려가 매질을 당했다.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도 그는 하루도 잊지 않고 '대한독립'을 꿈꾸며 노래를 읊조렸다고 손자는 회상했다.

'눈물은 강물이 되고 한숨은 강풍이 된다'는 구슬픈 노랫가락이 지금도 귓전에 맴돈다며 눈물을 흘렸다.

1945년 8월15일, 그렇게 기다리던 조국 광복을 보고 그는 6년 뒤 눈을 감았다. 당시 73세였다.  정부는 지난 1990년 족보와 보훈지청에 남아있는 정보를 토대로 확인한 공적에 따라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손자 윤씨는 "조부님은 자랑스러운 애국지사로 국민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항일운동을 하셨다"며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부디 당신의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조국 독립을 위해 흘린 피를 꼭 기억하면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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