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금을 울리지 않는 정치

▲ 조동욱 충북과학대 교수
나는 우리나라 문학이 세계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우리나라 문학만큼 情(정)에 바탕을 둔 것도 없는 것 같다. 심수봉 노래대로 '사랑'보다 더 깊은 게 '情'이라고 했는데 문제는 이 情이라는 단어를 외국어로 특별히 번역 할 단어가 마땅하지 않다.

틀림없이 사랑과는 다른 데 굳이 번역 하자면 사랑에 해당하는 단어밖에 사용할 단어가 없다. 이런 실정에서 노벨상 후보로 가 봐야 심사위원들이 한글을 모르는 입장에서 영어로 변역한 것을 보면 우리네 情에 대한 정서를 제대로 이해 할 리 없으니 세계적으로 인정을 못 받는 것 아닌가 싶다. 이러한 우리네 정서를 이용해 돈 몇 푼 안 들이고 흥행에 성공한 영화가 한 편 있다. 바로 워낭소리이다. 이 영화는 팔순 먹은 노인과 사십 먹은 소와의 끈끈한 情을 그린 영화이다. 영화의 내용 인 즉 귀가 잘 안 들리는 노인이지만 워낭 소리는 귀신 같이 듣고 소 먹일 풀을 베기 위해 매일 산을 오르고 심지어 소의 건강에 안 좋을까 봐 논에 농약조차 안 친다.

소 역시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 최노인이 고삐를 잡으면 산 같은 나무짐도 마다 않고 나른다는 내용이다. 표피적으로는 소와 최노인과의 情을 다루었고 내면적으로는 우리네 노인세대들의 자녀들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과 情을 다룬 것 아닌가 한다. 내가 대학 다닐 적만 해도 대학을 우골탑이라 하였는데 시골에서 논농사 지어 구부러진 허리 속에 자녀들에 대한 사랑, 부모 자식간의 情으로 자녀가 대학을 다니던 것이 우리네 대학생 모습이었다.

아무튼 우리들의 삶에 있어 끈끈한 情을 그린 영화여서 많은 분들이 눈시울을 적혀 가며 보았다고 한다. 심지어 이대통령 내외분조차 이 영화를 보았다고 하니 情을 통해 심금을 울려준 영화 아니었나 싶다.
아무튼 워낭소리는 우리들 심금을 울렸기 때문에 성공한 영화가 되었다. 그저 노인 한 분, 소 하나만 나왔어도 情을 바탕으로 심금을 울리니 영화가 성공한다. 정치도 이랬으면 좋겠다. 당장 우리를 잘 살게 해 주지 않아도 좋다. 문제는 정치현장에서 우리네 심금을 울려 주는 모습을 한 장면도 보질 못하니 그저 영화 따로 관객 따로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만약 워낭소리가 심금을 울리지 못했다면 노인네 하나, 소 한 마리 나온 이상한 영화라는 생각밖에 안 들지 않았을까?
도처에서 현 정치권에 대해 정감 있는 워낭소리는 안 들리고 이건 아닌데 하는 워닝(warning)소리만 들린다. 경제, 사회, 소외계층, 용산 철거민의 한 맺은 눈물 소리 등 현 정부가 어딘가 잘 못 하고 있는 것에 대해 국민들의 경고음이 많이 들린다.

국민과 정부는 소와 최노인처럼 워낭소리를 통해 깊은 정을 나누어야 한다. 이럴 경우 국민들은 기꺼이 현 정부의 소가 되어 줄 수도 있다. 또 최노인과 소처럼 끈끈한 정을 맺어야 나라도 산다. 소에 매달린 워낭소리를 듣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 진정으로 워낭소리를 듣고 싶은가?그러려면 국민들의 워닝소리를 경청하라. 그 순간 워닝소리는 워낭소리로 바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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