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마을인 회인 문의는 초기부터 교도활동 치열

# 회인지역은 민란 동학혁명 연결고리

회인현아<사진:회인현아>

강병뢰(姜炳雷73) 노인의 증언에 따르면 계사(1893)년 민란때 탐학했던 원님을 묶어서 여러 마을로 끌고 다니다가 신궁리에서풀어줬다 고 한다.

이어 우리 증조부가 회북면 용곡리 사람인데, 갑오년 동학 때 싸움을 했다는데 늘 늘씬한 말을 타고 다녔다는 말을 들었다 고 증언한다.

이 밖에도 회인에 동학 접주는 박만갑 장군이었다 유한동이 할아버지도 동학하다 죽었다 등의 증언으로 조선후기의 민란과 동학혁명의 연결고리를 엿볼 수 있다.

청주에서 가파른 피반령을 넘으면 바로 회인이다.

깊은 골짜기아래 평평한 들이 넓고 기름져서 옛적부터 양반 토호들이 터 잡고살았다.

그래서 양반 토호세력들의 수탈이 있었고, 원민도 많아서민란이 일어났고, 이 바탕에서 동학의 뿌리도 쉽게 내렸을 것으로추측된다.

회인에 동학교세가 성했던 것은 동학 대도소가 있는 보은의 이웃고을이라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양반 토호세력 - 교도간 극단적 대결국면

문의 지방에 동학교도의 활동 기록은 보은 취회 뒤인 1893년 10월경에 교단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시기 기록에 문의에 임정재(任貞宰任貞準)포(조직) 가 나온다.

이는 충청 호남 강원 16개 지역 중 하나인데, 그만큼 문의 지역동학 교세가 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들은 보은 취회에 주도적인 활동을 벌인 기록이 보이고, <동비토록(東匪討錄)>과 <주한 일본 공사관 기록>에 소사전(小巳田청산 작은뱀골)에 집결한 동학 교도들이 4월8일에는 회덕 관아를 공격하여 무기를 빼앗고, 4월9일에는 진잠으로 향했다.

4월 10일 회덕 진잠 일대에 머물던 동학교도들은 청주 진남영병과 옥천 병정의 공격을 받고 격파 당하였다.

그러나 이들 동학교도들은 4월 13∼15일 쯤에도 옥천 회덕 진잠문의 청산 보은 목천 일대에 무리를 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는 기록으로 미루어 문의 지역 동학교도들은 이 일대의 동학교도들과 연계하여 활동했던 사실을 보여준다.

또, 옛적부터 문의는 양반 관료의 늑탈을 많이 받아 원한이 누적되어 왔던 고을이라 갑오년 4월28일에 청산 보은 옥천 회인 진잠 목천 지역과 관아와 양반 토호의 집을 습격하고, 혹은 전곡(錢穀)을빼앗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는 기록도 보인다.

이는 갑오년 봄부터 문의 동학교도들이 관아를 점령하고 양반토호들을 공격하는 등 활동이 치열했음을 보여준다.

이 밖에 갑오년봄 초기의 구체적인 활동 기록도 보인다.

갑오년 4월에 작성한 문건에 동학도들에게 습격을 받은 양반 토호들이 동학 토벌대 를 조직하는데 협력했다 문의 서면 등동(登洞) 신대(新垈) 검소(黔沼), 우모실(牛母實) 등지의 오 씨 최씨 등이 양곡을 조달했으며, 화산(花山)의 신 참판댁이 협력했다는 기록으로 당시 문의 지역의 양반토호 세력과 동학교도의 극단적인 대결 국면을 엿볼 수 있다.

이 같은 갑오년 봄의 충청도 동학 활동은 학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이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문의문화재단지문의 지역에는 동학혁명 후기에도 참혹한 토벌 전이 벌어진다.

즉, 동학군 토벌 전에 나선 일본군은 11월10일 청산에서 동학군과 전투를 벌였고, 12일에 문의로 들어왔다.

당시 문의 지방에는 수많은 동학군이 집결해 있었는데, 마침내 13일 아침에 전투가 벌어졌다당시 문의 전투의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일본군의 보고에따르면 20여 명의 동학군 전사자와 무수한 부상자를 냈으며 대포 2문, 화승총 40여정, 그밖에 화약과 창 등을 노획했다 는 기록으로미루어 동학혁명군은 관아에서 탈취한 군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전투가 어느 정도 치열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문의는 대청댐으로 삶의 터전이 물에 잠긴 고을이다.

당시의 관아와 향교가 산 아래 쪽으로 옮겨서 복원되어 있지만 동학혁명사적은 아직 복원되지 못했다.

# 잔인하고 참혹하게 자행된 관군 토벌전

두 지역의 동학교도 활동이 치열했던 만큼 관군의 토벌전도 참혹하게 자행된다.

이두황의 초토 기록에 따르면 10월 13일 회인에서 유홍구(柳鴻九), 윤경선(尹敬善), 이승일(李承一), 우범손(禹範孫) 접주를 포박했고, 다음날인 14일에는 보은 대령(大嶺)과 풍취점(風吹店)에서 포살한다.

15일에는 보은 동학도 최윤백(崔允伯) 최명백(崔明伯)을, 16일에 다시 회인으로 들어와 보은 신촌(新村) 방갑준(方甲俊) 권망아지(權亡兒之) 이광직(李光直), 이천 노곡(老谷)의 홍복용(洪卜用), 안성 기좌촌(基佐村) 신덕보(申悳甫), 충주 모두원(毛豆院)안재용(安在用), 17일에는 용인 접주 이청학(李靑學) 등 많은 동학지도자들을 붙잡아 학살한다.

이 시기는 주력의 북접 동학 혁명군이 논산으로 이동하여 전라도에서 올라온 전봉준 군과 연합하여 공주 대접전을 벌이던 시기다.

이로 미루어 동학 혁명군의 또 다른 세력들은 지역에 남아 방어임무를 수행했던 것 같다.

당시 이두황이 지휘하는 관군은 토벌 전 초기인 한 달 동안은 꾸물거리다 일본군의 신병기 지원을 받은 뒤부터 민첩해지고 잔인한학살이 자행된다.



문의향교. 동학혁명 당시 민중과 양반세력과 긴장관계에 놓여 있었다. 수몰과 함께 현 위치로 이전되었다.



채길순 소설가 ·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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