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순 복대초 교장·시인

[박종순 복대초 교장·시인] 온종일 걸어 다니던 해님이 서산마루에 올라 넘어갈 때는 어머니 품속처럼 포근한 노을을 짓고 떠난다. 마침내 불덩이 해님이 넘어가고 하늘엔 아쉬운 듯 노을의 꼬리가 길게 수놓아져 있다. 설날 저녁 혼자 조용히 노을을 바라본 것은 60년 만에 처음인 것 같다. 오전에 조상을 위한 합동차례미사를 성당에서 올리고 고향을 찾아 온 사람들과 새해 인사 겸 덕담을 나누었다.

 이런저런 바쁜 일이 겹쳐 명절을 앞두고 스승님을 찾아뵙지 못해 남편과 딸 사위를 데리고 스승님께 세배를 드리기로 하였다. 조심스레 전화를 드리니 보고싶다 하셨다. 나의 영원한 스승 김현구 박사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시고 청주교육대학교 총장으로서 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우리 지역사회 큰 인물들의 멘토 역할을 해주신 철학과 굳은 신념으로 일가를 이루신 분이다. 한 가지 마음 쓰이는 것은 올해 93세가 되시어 신체건강이 썩 좋지 않으신 점이다. 걱정반 방문하니 침대에 누워 계시는데 다소 수척하신 모습이다. 금방 알아보시고 천천히 거실로 나오시어 우리 네 사람의 세배를 받으셨다.

 온 가족 세배를 받으니 오랜만의 행복이라고 미소를 지으신다. 준비해간 영주한과와 제천사과를 깎아드리니 맛나게 드신다. 22세에 졸업과 함께 수곡 교정을 떠나 충북교단에서 41년! 늘 어리기만 하던 제자가 정년을 맞아 황조근정훈장을 받게 되었다고 이런저런 말씀을 듣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교수님! 제천에 사는 이규순인데 이번 설에 못가서 아들이 대신 인사차 들른다'는 전화였다.

 이규순 선생님은 내가 제천으로 초임 발령을 받고 교단에 섣불리 임할 때 대선배로서 늘 너그럽게 감싸며 교육의 길을 안내해주시던 좋으신 선배님이셨다. 30여년 만에 선배님을 전화로 다시 만난 것이다. 선배님은 교대 5회이시니 70이 훌쩍 넘은 그 연세에 여제자로서 스승을 잊지 않고 설날 전화를 주시니 흔치않은 감격이다. 제천에 가게 되면 꼭 찾아뵙고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 마음을 전해드렸다.

 우리를 연결하는 스승님이 건강하게 더 오래 사셔야 하는데 그 바람을 안고 기념사진을 찍고 아파트 문을 나서는데 마음이 그리 놓이지는 않는다. 책 정리 등 짐을 정리하려 학교로 향했다. 2층 교장실에 올라 베란다에 나가서니 명절이라 개방한 교문으로 차가 들어와 줄지어 주차되어 있다. 아이들의 놀이터 운동장을 고요히 내버려두고 나무 밑으로 그림처럼 차를 세운 사람들이 고마웠다. 서녘 하늘을 보니 어느 새 노을이 곱게 물들고 있다.

 우리학교 운동장은 크고 넓어서 하늘이 가득 차고 고요함이 깃든다. 새들은 아무 걱정도 없이 노을 빛 하늘 속을 날아다닌다. 한 살 더 먹으려 떡국은 먹었는지, 서로 세배는 했는지 운동장 가득 아우성치던 아이들이 보고 싶다. 아이들도 가끔 노을을 바라볼 수 있으면 한다. 무한히 말없이 베푸는 자연과 하루를 함께한 사람들에게 노을을 보며 아름다움과 고마움을 느껴야하기 때문이다. 오늘 만나 뵌 아흔 넘긴 스승님과 일흔 넘긴 선배님의 노을이 내 가슴을 서늘하게 물들인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외롭다는 건 노을처럼 황홀한 게 아닌가! 새해엔 가끔 자녀의 손을 잡고 함께 노을을 바라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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