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영임 국어강사 |
얼마 후면 만개할 벚꽃에 대한 기대로 시작해서 북한 로켓발사에 대한 뉴스로 끝난 주말이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24시간 내내 뉴스만 내보내는 채널을 틀어놓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세상 변하는 게 참 빠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다지 오래 살지도 않았는데 노인네 같은 소리를 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의 변화가 빠르다는 것은 확실하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땐 텔레비전의 방송시간이 따로 있었다. 평일엔 정오에 일단 방송이 한 번 끝났다가 오후 다섯 시 무렵에 다시 방송이 시작 됐는데 토요일엔 그 시간이 몇 시간 앞으로 당겨졌다. 그래서 토요일이면 텔레비전을 보고 싶은 마음에 학교가 끝나는 대로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와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하는 노래로 시작하는 반공영화를 보곤 했다. 딱히 그 프로그램을 좋아 했던 건 아니고 단순히 텔레비전을 본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그래도 영화의 끝부분쯤에서 목숨 걸고 싸우던 군인이 죽고 그의 동료가 흙무더기에 깃발을 꽂는 것 같은 으레 나오던 클라이맥스 장면에 이르러서는 애국심과 함께 눈물 콧물이 흘러넘치곤 했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열심히 반공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내 경우에는 반공교육이 꽤 잘 됐던 게 아닌가 싶다. 당시 할머니께서는 토요일을 반공일이라고 하셨는데 나는 오랫동안 그 말이 '반공'일 인줄 알았다. 어린 마음에 토요일마다 텔레비전에서 반공 영화를 틀어주는 건 그 날이 '반공' 의식을 높여야 하는 날이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고는 "아마 6.25가 일요일에 일어났으니까, 이번에는 토요일마다 반공해서 못 쳐들어오게 하려는 걸 거야"라는 생각을 해내고는 "어른들의 의도를 스스로 알아내다니…"하며 자신의 영특함에 우쭐해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반공일'이 종일 쉬는 공휴일이 아니라 반만 쉬는 날이라서 반'공휴일'의 준말이라는 걸 알았을 때 어찌나 실망스럽던지 투철하던 반공정신은 물론이요, 애국심마저 흔들렸다.
지금도 북한의 방송을 볼 때마다 그와 너무나 흡사했던 유년시절의 반공교육이 떠오른다. 빨갱이란 말이 욕과 동일어로 쓰이던 시대를 지나 2002년의 함성으로 레드 콤플렉스를 건너 금강산 관광과 개성 공단을 거치며 지금 남한과 북한은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북쪽에 피붙이는커녕 사돈의 팔촌도 없는데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밤새워 보시던 아버지처럼 오늘 나는 북한의 로켓 발사에 대한 온 세상의 반응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북한은 어쩌자고 저런 걸 쏘아 올리나 하는 생각에 눈살을 찌푸리다가도 해외에서 북한의 행동에 대한 안 좋은 말을 할라치면 그러는 제 나라는 우리한테 동의 구하고 인공위성 쏘아 올렸나,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안으로 굽어드는 팔과 믿는 도끼에 찍힐 것 같은 발등 사이의 고민이다.
세계 최후의 분단국. 그것이 한반도의 다른 이름이다. 국경선이 아닌 휴전선으로 구분되어진 땅. 아직 쉬고 있을 뿐인 전쟁의 그림자를 보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주위는 평화롭다. 그리고 이것은 불완전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위장된 평화는 아니다. 남한과 북한은 50년 남짓의 시간동안 성과를 일궈내기도 하고 문제를 키워 오기도 했다. 그것은 변화이다. 더 이상 투철한 반공교육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이다. 나는 이것이 우리 사회가 더 나아진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렇다면 믿어야 할 것은 미래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