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익 전 충북단재교육연수원장

[오병익 전 충북단재교육연수원장] 행복학교로 충북에선 대안학교인 양업고를 꼽는다. 윤병훈 초대 교장선생님은 언제나 학생들과 함께 운동하고 슬플 땐 눈물 펑펑 나누며 일과를 뒹굴었다. 천주교 신부님이기도 한 그의 저서 '발소리가 큰 아이들' 중, '내가 크면 선생님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학생은 학년이 올라가 담임이 바뀌었을 때도 모든 선생님이 다 그런 줄 알고 선생님 공포증에 걸려 있었다. 또한 학교 공포증 때문에 학교를 벗어나면 금방 괜찮다가도 학교를 보면 입술까지 마르고 갈라 터진다.'란 내용이 나온다.

 행동과 혹독한 반항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대안교육, 가슴 뻐근한 공명에 싸인다.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자, 행복능력을 가르치자'며 행복할 때 공부가 더 잘 된다는 꼴찌들의 통쾌한 반란까지 성장 동력에 올인한 교육은 가히 '충격'으로 불렸다.

 입학 두 달 째인 새내기 초등학생 외손주, 생각만으로 신선하다. 친구가 여럿 생겼다더니 드디어 일을 냈다. 반 아이들 다툼에 분쟁 해결사로 나선 것이다. 논리와 주장의 실체적 진실을 밝혀 조정 일체를 마무리 했단다. 얼마나 실험적인가. 용기 있는 생활이 흥미로워 꼬치꼬치 물었다. 중재 도중 언뜻 튀어나온 '권리'라는 고급용어 사용에 대한 상대방 긴장으로 짐작한다.

 학년을 오를수록 또래끼리의 자구안은 더욱 변화무쌍하게 확대될 궤적까지 그려진다. 교과서대로 동일 내용을 공부하는 시대는 끝났다. 학교야말로 학생 심장을 정상 박동케 하여 세상 품는 행복 학습 장소다. 충북교육 강점으로 부각된 '행복학교' 역시 행복씨앗과 행복교육지구를 굴려 행복 마중물을 얻는 백신 접종과 같다.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온 동네 사람의 사랑·관심이 필요하듯 교육은 지역사회와 동행을 강조해 왔다. 궁극적 행복의 직접변인도 진정한 만남과 관계 속에 영글어간다. 행복을 짓는 교육, 객관 공평보다 주관적 교학상장(敎學相長) 아닐까.

 지난해, 우리나라 어린이와 청소년의 '주관적 행복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로 분석됐다. 1위는 교육 지향점을 '행복 발견'에 둔 네덜란드로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신나게 놀기와 취미 활동이 전부다. 필자는 '변화와 혁신 역량은 참 교권'에 있음을 지속적으로 집필해왔다. 최근 발생한 공교육 속 사건사고 유형은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의 헛발질 수위를 넘었다.

 교육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홍역을 앓고 나서야 비로소 아픔을 느끼니 걱정스럽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게 더 문제다. 매서운 자숙을 외면하면 또 언제 어떤 파멸이 자초될지 위태롭다. 교권·학생인권 법령 개정 및 보완책을 서두르고 있으나 제도·법이 물러서가 아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살아있는 사랑'을 앞설 교본은 없다. 행복은 헤플수록 좋다. 가진 것·높은 것에 매달리는 거야말로 진짜 불행하다. 행복교육 그 실체적 진실이 혼란해선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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