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익 전 충북단재교육연수원장

 

[오병익 전 충북단재교육연수원장] 엄마는 / 별별 걱정 다하는 사람 / 똑같은 얘기 "……" / 벌써 다 외웠다. / 필자의 동시 '엄마는' 전문이다. 가정의 달을 맞아 학년·성별을 고루 섞어 "엄마하면 생각나는 것?"을 물었다. 내 심, '최고 보호자'를 기대했으나 대부분 '잔소리 꾼'으로 응답했다. 저녁 늦은 시각까지 감감 무소식인 대학생 막내에게 "뭐하고 있어, 몇 시 올 건데?" 음성 메시지를 보내고 10분 쯤 지났을까, 휴대전화 문자로 "걍~" 이란 답글이 찍혔다. 완전 무시를 따지려 했지만 결국 '참견·꾸중' 같아 혼자 화를 삭이고 나니 마음 편한 걸 어쩌랴.

 좋은 시(詩)엔 군더더기가 없는 것처럼 내용을 줄여 원활한 소통을 이뤄내는 건 엄청난 무기다. "걍" 역시 비언어적 메시지를 포함한 여러 의미로 나름 사용했으리라. 잘못된 대화는 좌절감과 상처가 깊어 관계회복이 어렵다. 공감하며 듣는 경청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부분 흔쾌하지 않은 '그러나, 그렇지만, 그게 아니고'에 따른 저항일 수 있다.

 청소년들 일상 언어를 들여다보면 낯을 붉힐 만큼 오염이 심각하여 소름끼칠 정도다. 원인 중 하나로 부모·자녀 간 엇박자를 지적한다. 살아 숨 쉬지 않은 말일수록 공허하다. 행동을 담아내야 마음을 움직인다. 대화가 늘 심문(審問)하는 식이어서 재판(裁判)같은 경우도 잦다. "충분히 이해한다, 힘들었구나, 그럴 수 있겠다" 자녀에 가늠자를 정조준하는 풀무질 어떤가. 그러나 아이 앞에서 "네 친구 중 누가 널 괴롭히니?"를 꼬치꼬치 다그친다.

 부모와 자연스런 소통에 익숙할수록 사춘기가 돼도 대화를 술술 이어간다. 쓸 말보다 감정적으로 퍼부을 땐 심드렁해져 오히려 무관심에 빠질 수 있다. 대화란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다. 자녀들도 열린 대화와 닫힌 대화를 용케 구별한다. 인성은 말의 건강에 달렸다. 엄마에게 잔소리야말로 익숙한 주제이지만 혼란을 예상한 주제일수록 요점 정리가 필요하다.

 자녀를 기계처럼 돌리려는 발상으론 창의나 자기 주도적 역량은 고사하고 폭력과 학대·인권의 어둠으로 찌든다. 좀 더디면 어떤가. '욕하면서 배운다'고 했다. 헝클어진 대물림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 지 뼈아픈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입체적 대응 역시 인성교육을 꼽는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없듯 아이에게 딱 들어맞는 공식도 없다. '요즘 아이들 어른을 모른다'고 걱정한다. 아이들은 되레 '어른들은 우리를 몰라준다'며 답답함을 토로하니 부모와 자녀 사인 철저한 보호자임에 틀림없다.

 어머니 손은 약손을 초라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 고사(枯死) 직전 인성 출구를 찾아야 한다. 뜨거운 담장에 뿌리를 앉히면서도 끝내 담을 넘고야 마는 담쟁이 교훈의 낯섦일까. 너무 결과만 집작한 채 긴 기간 동안 땀과 뿌리의 고마움을 잊은 채 모호한 잔소리, 유쾌하지 않을뿐더러 설득력도 떨어진다. 더구나 불편한 심기에서 분출하듯 쏟아낸 경우 인성까지 덧나기 일쑤다. 지름길은 '걸러내고 솎아내고 잘라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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