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1장 달빛 고요한 밤에
흙벽돌에 기와를 얹은 담벼락을 따라 스무 걸음 쯤 걸어가서 모퉁이를 돌면 당집 대문처럼 작은 쪽문 지붕이 보인다. 박평래는 바쁜 걸음으로 걸으며 쪽문을 바라본다. 점순이가 토끼처럼 쪽문 안으로 폴짝 뛰어 들어간다.
쪽문의 문지방은 허리가 휜 소나무를 그대로 사용해서 중간이 불룩하다. 문지방 안으로 들어서면 양쪽으로 담장 밑에 작약밭이 있다. 동백꽃보다 크며 빨갛고 흰 작약이 송이송이 매달려 있는 작약밭 앞으로는 툇마루가 보인다.
툇마루 뒤에는 방이 두 칸 있는데 한 칸은 이동하의 외동아들인 아홉 살짜리 승철의 방이다. 승철은 작년부터 학산에 있는 들례 집에서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다. 주말에나 학산면의 부면장인 이동하나 면사무소 소사인 박생수의 자전거 뒤에 타고 집으로 온다. 옆방은 딸들이 방학 때나 기거를 하는 방이다. 올해 중학교 1학년인 큰 딸 애자하고, 국민학교에 다니는 말자와 영자는 대전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그 방도 비어 있다.
박평래는 툇마루 안채 마당으로 들어간다. 앞마당의 담 가운데는 솟을대문이 우뚝 서 있다. 행랑채 옆에는 옥천댁이 아들 낳기를 기원하며 심어 놓은 석류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반대편의 헛간 과 외양간 옆에는 대추나무도 서 있다.
박평래는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정지 안을 슬쩍 쳐다본다. 이병호의 며느리 옥천댁이 만삭의 몸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 점순이는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서 불을 살피고 있다.
정지 옆은 안방이다. 안방과 마주 붙어 있는 윗방에서 'ㄱ'자로 꺾이는 지점은 대청마루, 대청마루 옆의 사랑방 앞에는 누마루가 있다. 원두막처럼 기둥위에 있는 누마루 밑에 쇠죽솥이 걸려있다.
"면장님 지 왔구만유."
박평래는 점순이를 따라 오느라 턱까지 차 오른 숨을 고르지도 않았다. 입 안 가득 고여 있는 단침을 꿀꺽 삼키고 사랑방 누마루를 흘낏 바라보고 나서 두발을 딱 붙인 자세로 섰다. 마치 절이라도 할 것처럼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이병호를 불렀다.
누마루에는 백양나무에 검게 옻칠을 한 난간이 있다. 난간 뒤편의 사랑방 덧문은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었다. 미닫이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누마루 건너편으로 이병호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이병호의 숱이 적은 머리카락은 포마드를 발라서 머리에 찰싹 달라 붙어있었다. 양쪽으로 가르마를 탄 머리카락은 검은 머리카락보다 새치가 많다.
"왔는가? 뒷간이 차서 불렀네."
그는 마당에서 짤막한 그림자를 붙들고 서 있는 박평래를 바라보지 않았다. 눈앞으로 펼쳐지는 동네의 게딱지를 엎어 놓은 것 같은 초가지붕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동네 앞에서 버티고 있는 둥구나무 뒤 들판에서 보리들이 넘실거린다. 바람이 크게 불면 푸른 보리밭에 거대한 용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리를 심을 수 없는 진논에는 모 심을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들판 뒤로는 또랑을 가로막고 있는 방천이다. 방천 너머 풀밭이 한껏 푸른색으로 다가온다. 아지랑이가 햇살을 받아서 반짝반짝 거리며 하늘로 아른아른 올라가고 있다.
"바짝 서둘러서 해 전에 퍼내겠슈."
뒷간이 찼다는 말은 화장실의 똥을 푸라는 말이다. 어느 틈에 미닫이문은 닫혀 있고 이병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박평래는 닫힌 문을 향해 다시 한 번 허리를 굽실거리며 인사를 하고 허리를 폈다.
"비석골 꼬치밭에 갖다 뿌려. 해 전에 충분하게 끝낼 수 있겄지?"
사랑방의 미닫이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햇살을 받고 있는 사랑방문이 팽팽하게 문살을 조이고 있다. 그 안에서 이병호의 목소리가 무겁게 흘러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