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익 전 충북단재교육연수원장

 

[오병익 전 충북단재교육연수원장] 등굣길 가방이 무겁다 / 까맣게 그을리며 산과 들로 / 네 날개 원두막 참외 익는 냄새, / 촌수 따져가며 피붙이와 엉겨 / 모기 뜯긴 밤 / 산들산들 깃발처럼 방학일기 담아왔다. / 필자의 동시 '개학'이다. 방학으로 시끌벅적했던 마을, 말매미 울음까지 사라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개학'을 맞은 만감 교차다.

한 달 남짓 "죽을 지경"였다는 강파른 하소연 쯤 이해한다. 전쟁하다시피 결기 찬 일상에 폭염까지 엄마들이 지쳤다. 그게 역동적 방학 증거다. 평소 아이에게서 눈치 채지 못한 '탈(脫)범생' 행동을 발견하곤 느닷없이 찬물 뒤집어쓴 것처럼 무안했다는 방학 뒤 담화다. 그러나 곰곰 들여다보면 모두 위험군은 아니다. 이런 경우 자꾸 들춰내려는 것 보다 엉킨 화(anger)를 풀어줘야 한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할 때 노엽고 답답한 감정이 묻어난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식 끝장 싸움은 상처만 키워 도미노처럼 무너질 수 있다. 부모는 언덕이다. 세상, 미워해도 될 아이는 없다.

필자 역시 두 딸의 아버지며 교육자로 40년 넘는 일기장 두께를 늘리지만, 아직 교육 앞엔 주눅 든다. 독단적 리더십 속에 아이를 다 키워내고 보니 무릎 치며 후회할 일 많다. 부모는 자녀의 잘못을 묵인할 때도 있고, 반사적으로 꾸짖는 경우가 빈번하다. 폭발적 욕을 퍼부으면 거름장치 없이 모방으로 이어진다.

마주칠 때마다 만화에 빠져있는 아이를 보면 화가 치밀어 "너 뭐하고 있니, 또 만화 그리는 거야? 그러니까 성적은 꼴찌지…"  발끈한다. "만화에 관심이 많구나. 숙제를 끝낸 후 계속하면 어떨까?"처럼, 취미를 달궈줄 고민의 공유에서 아이들은 점차 스스로 조절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  유해 내용 검색도 마찬가지다. 접속횟수의 57%는 부정기적인 반면, 6%의 경우 습관이 되다시피 했다는 통계에 놀란다. "또 봤지? 뭐가 되려고 그러니. 자꾸 그러면 휴대폰을 때려 부순다"로 고분 고분할리 만무하다. 윽박질러봤자 되레 해독은 어려워진다.

경험 앞선 부모보다 훨씬 아는 게 많아 어설픈 논리나 키워드로 딱 잘라 공감을 얻을 수 없다. 급박할수록 숨고르기가 필수다. 그런 다음 실타래를 풀어야 뒤섞였던 대꾸도 순화되어 돌아온다.  사람은 완벽하게 불완전하므로 '쓸모 있는 지혜는 부모 자식 간 대화에서 나온다'고 했다. 살다보면 멘토가 절실한 상황이 있다.

최근 '우량부모 실종위기'라는 사회 절규와 마찰에 당혹스러움까지 짙다. 생각 없이 살다보면 그게 정답으로 굳어버린다. 습관은 좀처럼 바꾸기 힘들다. 바른 가르침의 부재를 질타하는 비유로 부모 부담은 기대 반 우려 반 속에 혼란스럽다.  왜 그랬는지, 어떻게 풀어갈지, 멈추어야할 때·나아가야할 때·돌아봐야할 때를 아이 혼자서도 터득해 낼 허용적 분위기가 필요하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한 이유다. 자녀를 망치는 길, 눈 맞춤을 거부한 '무시해도 될 사람'의 인증 아닐까?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