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1장 달빛 고요한 밤에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문짝의 사각 모서리는 움푹 들어가거나 뒤틀려서 겨울에는 한데 바람이 무시로 드나들며 방안으로 냉기를 퍼 날랐다. 그래서 겨울이면 시간만 있으면 헝겊조각이나 마른 걸레같은 걸 뚤뚤 말아서 구멍을 막는 것이 일과였다.

그 방문이 열리면서 삐죽이 박태수가 밖으로 나온다.

박태수는 검게 염색을 한 군복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서 사타구니 사이를 긁으며 뒷간 앞으로 간다. 헛간 옆에 붙어 있는 뒷간은 수수깡을 엮어서 황토를 바른 벽에 문대신 가마니를 걸어 놓는 것이 전부다.

뒷간에 쪼그려 앉으면 비바람에 찢어지고 갈라진 가마니 틈으로 아버지 박평래와 어머니인 청산댁이 기거를 하는 사랑채가 한 눈에 들어온다. 불이 꺼져 있지만 아직은 바쁜 농사철이 아니라서 아직 잠들어 있을 시간은 아니다. 호롱의 석유를 아끼느라 불을 끄고 있을 것이다.

사랑채 뒤로 멀리 비봉산을 등지고 있는 면장댁 전등불이 보인다.

면장댁 담을 넘은 전등불빛은 면장댁 솟을 대문 아래에 낮게 엎드려 있는 초가집들을 어스름하게 비추고 있다. 그 불빛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까 옥천댁 얼굴이 떠오른다.

면장댁에 일을 하러가서 어쩌다 얼굴이 마주치면 고개를 숙이며 외면을 하는 옥천댁의 얼굴에는 늘 그늘이 져 있다. 동네에 있는 다른 여자들처럼 들일을 하지 않아서 백합처럼 흰 얼굴에 그늘이 져 있는 모습을 보면 소용이 없는 걱정인 줄 알면서도 가슴이 아렸다. 그래서 시간이 있을 때는 일부러 올라가 일을 찾아서 장작도 패주고 마당도 쓸어주기도 했다. 비가 올 징조가 보이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올라가서 늦도록 비설거지를 해주고 나야 마음이 편할 때가 많았다.

"이따 밤에 면장댁 불 꺼지믄 또랑가로 나와 존 일 있을팅께"

저녁나절에 둥구나무거리에서 만났던 김춘섭이 떠올랐다. 둥구나무 밑에서 만난 김춘섭은면장댁에서 기르는 독구가 쥐약을 먹고 죽어서 비봉산에 파묻고 오는 길이라며 히죽 웃었다.

"별일이여.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읎다는 말은 들어 봤어도, 면장댁 개가 끼니를 거를 리도 없는데 먼 맛으로 쥐약을 처먹었을까?"

"점순이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 가텨. 학산 들례네 집에서 식모를 사는 춘임이가 점심나절에 왔다 갔다고 하든데 그기 암만해도 수상하다는 거여."

"설마? 들례가 면장님 승질을 모르겄어? 만약 면장님이 그 사실을 알게 되믄 무사하지 못하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닐 틴데?"

"아! 옥천댁이 쪼금만 있으믄 아를 낳잖여. 만약, 이븐에 아들을 낳게 되믄 들례 신세가 워치게 되겄어?"

"내가 그 댁이 자주 들락거려서 하는 말은 아니고 자네도 생각을 해 봐. 춘임이가 면장댁엘 왔다믄 부면장님 심부름을 왔겄지. 들례 지가 뭐라고 감히 춘임이를 면장댁으로 보내겄어. 부면장님이 그 집에서 살기는 하지만 첩도 아니고 암 것도 아닌 주제에……"

"하긴,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렇구먼. 그람 왜 멀쩡한 개가 쥐약을 처 먹었댜? 자네 말대로 개를 굶길 집도 아닌데."

"그걸 내가 워티게 알겄어? 순전히 죽은 개 맘인데."

"어쩌믄 우리 같은 놈들 보릿고개에 피죽도 못 먹고 있응께 몸보신하라고 죽었을 껴. 그치?"

"그람, 머여. 쥐약을 처먹고 죽은 개를 먹자는 거여?"

"못 먹을 이유도 읎지. 요새처럼 춘궁기에 독구만한 개를 그냥 땅에 파묻어 썩혀 버리는 건 하느님한테 큰 죄를 짓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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