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광섭 컬처디자이너·에세이스트

[변광섭 컬처디자이너·에세이스트] 가을 햇살이 쟁쟁하다. 가슴 깊이, 마음까지 파고든다. 들녘의 곡식이 여무는 것도 가을 햇살이다. 여름의 햇살은 뜨겁지만 가을 햇살은 깊이 스며든다. 괴테는 생명이야말로 변화할 때 성장하고 젊어진다고 했다. 그러니 가을엔 하늘을 보고 숲을 보며 알알이 영그는 들판의 곡식을 보라. 책을 들고 노래를 하며 사랑하고 마음껏 희망하라. 나만의 아우라를 만들라. 아우라는 자신의 일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최선을 다할 때 생기는 경이로움이다.

그날 사진 한 장이 내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괴산 청안의 한운사 기념관을 들렀을 때 전 국회의장 김재순 씨와 한운사 선생이 마주하고 있는 사진이 계단에 걸려 있었다. 뭔가 특별한 인연이 있을 것 같아 그 장면을 핸드폰에 담았고 서울 샘터출판사의 김성구 대표에게 보냈다. 곧바로 전화가 왔다. 어디서 찍은 사진이냐, 두 분은 각별한 인연이 있었는데 당장이라도 내려가서 기념관을 둘러보고 싶다며 호기심 가득했다.

고인이 되었지만 김재순 씨는 샘터 잡지를 창간한 분이다. 국회의장을 지냈으며 이 땅의 척박한 출판시장을 기름지게 가꾸고 문화강국을 만드는 일에 매진해 왔다. 지금은 아들인 김성구 씨가 샘터사를 지키고 있다. 서울 대학로의 빨간 벽돌 건물에는 출판사와 화랑, 극장이 있다. 대학로의 랜드마크다.

김 대표가 내려왔다. 기념관을 함께 둘러보는 내내 감개무량하다며 울먹거렸다. 한운사 선생과 김 대표 부친과의 수많은 인연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한 선생님은 근현대 한국의 영화, 드라마, 음악, 문학에 불멸의 꽃을 피운 위대한 분”이라고 했다. 기념관에 있는 모든 사진과 유품이 생생했다. 그날의 일들은 돌이킬 수 없지만 추억은 또렷했다. 그리움이고 사랑이며 존재의 이유다. 지나간 추억도 희망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방송작가, 시나리오작가, 작사가, 문인,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누구는 그를 가리켜 “우리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이자, 휴머니스트”라고 부른다. 영화 <빨간 마후라>, <현해탄은 알고 있다>, <남과 북>, <서울이여 안녕>, <아낌없이 주련다> 등 불후의 명작 20여 편을 만들었다. <이 생명 다하도록> 등 수많은 국민드라마를 집필했다. <잘 살아보세>, <빨간 마후라>, <남과 북>, <눈이 내리는데>, <서울이여 안녕>, <꿈나무>, <레만호에 지다> 등 심금을 울리는 노래가 얼마나 많았던가.

한운사는 굴곡진 역사의 한 가운데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희망의 나래를 펼쳤다. 일본 유학시절인 1943년 12월, 학도병으로 징집되었을 때 “우리가 학도병으로 전쟁에 나가면 2천5백만 조선 동포들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느냐”며 반기를 들었다. 한국작가협회 이사장을 8회나 역임했고 대종상, 청룡상, 방송대상, 백상예술대상 등 수많은 수상 기록을 남겼다. 그의 아들 중 한상원 씨는 ‘한상원밴드’의 주인공이자 기타리스트, 작곡가다.

내년 8월이면 작고 10주기가 된다. 한운사는 그 이름만으로도 대한민국 최고의 콘텐츠다. 전설이다. 불꽃이다. 아쉽게도 한운사의 크나큰 뜻과 업적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며 시대정신에 맞는 콘텐츠를 개발하는 일에는 소홀히 하고 있다. 콘텐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말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나서야 한다. 선생의 업적을 아카이브화 하고 다큐, 드라마, 영화 등의 콘텐츠로 특화해야 한다. 한운사 예술제, 한운사 아카데미, 한운사 예술상 등을 전개해 이 땅에 제2의 한운사를 키우는 일에 매진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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