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광섭 컬처디자이너·에세이스트

 

[변광섭 컬처디자이너·에세이스트] 밥알을 씹다가, 길을 걷다가, 커피를 마시다가, 뜨거운 태양을 보다가, 책을 읽다가, 운동을 하다가, 갈색 깃발 휘날리는 낙엽을 밟다가, 땀을 훔치며 일을 하다가, 늦은 밤 도시 골목길에서 삼겹살에 소주한 잔 하다가, 성당에 앉아 기도를 하다가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뭐 이런 나라가 있는지, 뭐 이런 사람이 있는지, 무슨 놈의 세상이 요지경인지, 나의 사랑은 아득하고, 나의 꿈은 정처 없고, 나의 열정은 짓밟히고, 나의 몸은 천근만근이고, 이 길의 끝이 어디인지 아득할 뿐입니다. 그래도 어딘가에 있을 희망을 찾아, 사랑을 찾아 길을 나서지만 치밀어 오른 화는 쉽게 가시지 않습니다.

하루하루가 이토록 처절하고 절박한지, 그립고도 쓸쓸한지, 왜 내게 참을 수 없는 시리고 아픈 고난과 시련을 주는지, 우리 사회는 가식과 욕망과 불평등으로 얼룩져 있는지, 내가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 두리번거립니다. 화가 나서, 너무나 속이 상해서 두 주먹 불끈 쥐어봅니다.

그래도 견뎌야지, 견디며 아픔을 보듬고, 아쉬움과 외로움을 딛고, 슬픔은 내 삶의 자양분이니 오늘도 앙가슴 뛰며 길을 나섭니다. 신문을 뒤적이며 오늘의 뉴스를 보고, 인터넷을 검색하며 새로운 정보를 만나고, 차창 밖의 풍경을 보며 아름다움에 대해, 존재의 이유에 대해 생각을 하고, 친구를 만나 커피를 마시며 삶의 노래합니다.

아파트 베란다에 곶감이 붉게 차오르고, 도시의 골목길에는 만추의 노래 반짝이며, 서재와 마을에도 단풍이 물드는데 사람들은 마천루 빌딩숲으로, 공원으로, 카페로, 골목길 깊은 그 어딘가로 저마다의 방식을 찾아 발걸음을 서두릅니다. 가는 걸음과 걸음마다 고단하지만 삶의 향기 끼쳐옵니다.

세상의 풍경을 보며 새삼 느낍니다. 삶이란 겪는 것이라는 것을. 이런 일, 저런 일, 기쁜 일, 슬픈 일 모두 겪으며 새로운 삶의 마디를 만드는 것임을, 상처가 깊을수록 풍경이 아름답다는 것을 지천명이 돼서 깨닫습니다. 지난 여름날은 얼마다 덥고 질겼습니까. 도시와 산천 모두 못살겠다며 비명을 지르지 않았던가요. 그래서인지 이번 가을의 단풍은 그 어느 해보다 진하고 아름답게 빛났습니다.

오늘 아침, 바람의 풍경을 보았는지요. 생각해보니 소나무 숲에서는 솔잎 향 가득하고, 꽃밭에서는 꽃잎과 꽃술이 나부끼고, 미루나무 아래에 서면 무성한 잎새들이 온 몸을 비비고, 호숫가의 반짝이는 은빛물결과 억새밭의 사각사각 흔들리는 풍경과 해변가의 파도소리 모두 바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골목길을 빠져나올 때, 내 어깨를 스치며 달아나던 것이 바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바람이 지나간 텅 빈 자리에 앉아 지나온 삶,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시심에 젖을 때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사람들은 만추의 풍경을 만끽하기 위해 산으로, 들로, 강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 곳에서 붉게 물든 풍경을 만나고 쓸쓸한 대지를 만나며 다시 오지 않을 추억을 담습니다.

내가 갈 곳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 전화가 오고 메일이 오고 문자메시지가 오고 또 오고 있으니, 내가 일구어야 할 꿈이 남아 있으니,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함께 가자고 손 내미는 사람이 있으니 오늘은 내가 살아야 하는 날, 가슴 뛰는 날, 굳게 잠근 마음의 문을 여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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