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혜영 서원대 교수

[황혜영 서원대 교수] 작년 앙상블 모멘텀 콘서트 가이드를 하면서 독일 작곡가 틸로 메덱(Tilo Medek, 1940-2006)의 '낮 그리고 밤의 작품집' 13번째 곡 '후터린의 상자(Der Kasten einer Hutterin)'를 알게 되었다. 우수와 격동이 동시에 느껴지는 곡 분위기도 독특하였고 가사도 없는 곡 제목 후터린의 상자가 무엇인지도 왠지 궁금하였다.

곡 소개를 보니 후터린은 16세기 초 급진종교개혁파의 한 분파로 종교지도자 야코프 후터의 역할이 지대하여 후터파 또는 후터라이트로 불린다고 한다. 이들은 합스부르크의 개신교 탄압을 피해 모라비아, 동부 트란실바니아, 루마니아의 왈라키아, 우크라이나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하였지만 1차 세계대전 때 양심적 병역거부로 미국정부와 대립하였고 그들이 쓰는 독일어 모라비아 사투리 사용도 제한받아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450여 년간 이주 후에 현재 이들의 인구는 약 45,000으로 회복되었고 거의 대부분은 캐나다 서부와 미국 대평원에 정착하였다. 지금도 후터파들은 교회와 국가의 엄격한 분리, 공동체 생활, 공동체소유재산, 전쟁 반대와 비폭력, 성인 세례 등 종교 개혁 초기 야코프 후터가 수립한 기본 신앙 교리를 지키며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관습과 언어, 소박하고 엄격한 생활을 유지해오고 있다.

꾸미지 않은 그들의 집에 어울리지 않는 나무상자가 있었는데, 사진, 향수, 매니큐어, 연애편지 등 지극히 개인적이고 죄스러운 것까지 모든 물건이 허락된 이 상자가 후터린의 상자라고 한다. 종교공동체 이민자의 녹녹치 않은 삶에서 이 상자는 개인의 자유가 전적으로 박탈되지 않도록 보장해주는 사생활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 생활의 갇힌 틀 안에 놓인 또 하나의 작은 틀인 후터린의 상자는 물리적으로는 폐쇄된 구조로 보이지만 상징적으로는 각 개인이 자신의 내면을 통해 자유와 해방으로 나가도록 안내해주는 열린 공간이다.

곡은 낮고 장중한 음으로 다소 무겁게 시작하다가 스타카토 연주 부분이 등장하면서 빠른 리듬으로 전이되고 장감 넘치는 모험이 펼쳐지는 느낌이 든다. 빠르고 급박한 리듬과 느리고 서정적인 멜로디가 교차되는 모험과 격동의 역동적인 연주가 이어진 뒤 후반에는 곡 시작부분 멜로디가 다시 등장한다.

이번에는 스타카토는 사라지고 점점 긴장감이 고조되다가 마지막 순간 마치 말줄임표처럼 하나의 낮은 음이 반복되다가 침묵과 여운을 남기며 예기치 않게 마무리된다. 수미상관으로 조응하는 곡 처음과 끝의 장중한 멜로디는 이민자의 팍팍하고 엄격한 신앙공동체의 테두리를 느끼게 해준다면, 곡 안에서 펼쳐지는 긴장과 이완이 교차되는 다이내믹한 리듬과 멜로디는 공동체 틀 안에서 각각의 개인이 내면에 간직해온 자신만의 자유로운 공간 상징하는 후터린의 상자를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후터라이트가 아니라도 보이지 않는 모든 외적인 틀에서 벗어나 한 모금 자유를 호흡할 수 있는 자기만의 내밀한 상자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나만의 후터린의 상자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무엇을 담아두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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