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룸에서 현장 회의를 하고 있는 sk하이닉스 직원들.

청사진은 원그림을 그린 용지와 감광지를 동시에 복사기에 넣고 햇빛 또는 전기 광선을 쬐어 복사한 사진이다. 토목·건축·기계 등 분야에 설계도로 쓰이다가 의미가 확장돼 미래, 비전 등을 뜻하게 됐다.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고 현재의 그림들이 쌓여 과거의 역사가 된다. 청사진의 원그림은 역사에서 시작된다. 누에를 치고 담뱃잎을 따던 충북이 반도체와 생명과학의 중심지가 된 건 우연이 아니다. 미지의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앞두고 지난 경제사를 돌아보며 충북경제의 미래를 엿본다.

▲1960년대 모내기와 벼베기.
▲1960년대 모내기와 벼베기.

◇식민지 수탈의 폐허에서 씨를 뿌리다
'식량증산 실천요강성안… 금년목표는 222만석'. 1965년 3월2일자 충청일보 창간기념호의 톱기사 제목이다. 기사 첫 문장은 '식량증산제1차년도인 금년에 각종식량 222만2719석의 생산을 목표로하는 충북도는 이의 달성을 위해 유기적이고도 과학적인 실천요강을 작성, 각 시군에 시달했다.'로 시작한다. 농업이 도정의 최우선 과제임을 알 수 있다. 전형적인 농업도였던 충북은 1963년까지도 인구의 87.3%가 1차산업에 종사했다. 일본제국은 우리나라 경제구조를 대륙침략에 필요한 군수기지로 만들어놓고 철수했다. 해방 후 남한 지역은 전기조차 제대로 공급받기 어려웠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충북의 상공인들은 1946년 6월 1일 상공회의소를 발족시켰다.

충청일보가 국민일보라는 제호로 창간한 지 꼭 3개월만의 일이다. 1949년 4월에는 허광 국민일보 발행인이 2대 회두로 선출돼 충북상의를 이끌었다. 충북상의는 물자부족으로 인한 서민생계의 곤란을 해결하는데 앞장 섰다. 6·25 전쟁 이후에는 청주상공회의소가 충북상의 역할을 대신했다. 1951년 청주상의는 법원청사 신축 운동과 괴산수력발전수의 건설 과정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청주지방법원 청사 신축은 충청일보 전무를 역임한 김창기 편집국장이 적극 지원해 한국전쟁 이후에 결실을 맺게 됐다. 국민일보에서 제호를 바꾼 충청신보의 이도영 사장은 청주상의 2대 회장으로 충주비료공장 유치 등에 힘썼다. 국회의원(1950~54)을 지낸 이 회장은 대한상공회의소 상임의원을 겸했고 중앙재계에서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상공인들의 노력은 1962년 중소기업협동조합 발족 등으로 싹을 틔워 청주지역은 도시화와 더불어 제조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 1960년대 충청일보사.
▲ 1960년대 충청일보사.
▲1965년 3월2일 1면. 충북 경제 소식을 전하는 충청일보.
▲1965년 3월2일 1면. 충북 경제 소식을 전하는 충청일보.

 

◇대농 유치, 어렵게 부여잡은 도약의 동앗줄
1967년 어느날 청주상의가 바빠졌다. 당시 직물조합 이사장이던 청주상의 박연수 상임의원으로부터 대규모 면방직공장 건설 정보가 입수됐기 때문이다. 김종호 회장은 청주출신 정태성 국회 상공분과위원장 등 각계의 지원을 얻으려 동분서주했다. 당시 인구 30만이던 소도시 청주는 대농 덕분에 먹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양 최대의 방직공장'으로 불리던 대농은 종업원 숫자만 6000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대농 월급날 저녁이면 온 시내 식당과 술집들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유치 과정에는 지역 경제인들의 노력이 있었다. 대구지방에 공장부지를 물색하고 돌아가는 정부 담당자를 청주에 납치하듯이 데려와 설득하는 일도 있었다. 대농 유치로 충북경제는 산업화에 시동을 걸게 됐다. 1969년 10월16일 충청일보 3면은 '공업도시의 기치 마침내 오르다… 청주공업단지 착공'이란 제목의 기사가 가장 상단에 자리잡고 있다. 이 기사는 '청주시를 소비도시에서 생산도시로 전환하기 위해 총 공비 2억8800만원을 투입, 2개년 계획으로 1970년에 완공, 기계공업 등 25개 공장을 세우게 될 청주 공업단지 기공식이 15일 상오 10시30분 시내 복대동 현지에서 성대히 개최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산업화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청주공단은 1970년 11월 첫 단계가 조성됐다. 그러나 대단위화와 공장 유치에 어려움은 적지 않았다. 경제인을 비롯해 지역민들의 노력으로 지방공업개발 장려지구로 지정받게 되면서 총 면적 124만평에 달하는 중부권 최대의 공업단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청주산단은 SK, LG 등 세계적 기업들과 그 생산공장이 들어서 충북 제조업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 1960년대 청주시 전경.
▲ 1960년대 청주시 전경.

 

◇소비에서 생산으로… 내수에서 수출로
1979년은 충북경제사에서 커다란 변곡점이 됐다. 충북도는 청주공업단지 확장을 비롯해 충북선 복선화 추진, 대청댐 공사 마무리, 충주댐 건설 추진 등 산업기반을 확충했다. LG화학 전신인 (주)럭키는 이 해 청주에 공장 건설에 착수한다. 치약, 칫솔, 세제 등 생활용품을 생산하던 럭키에게 국토의 중심인 청주는 전국에 제품을 공급하기에 유리한 지역이었다. 1980년 치약공장을 준공하고 이어 칫솔공장, 모노륨공장, 액체세제공장, 에어로졸공장. 피부보호제공장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1983년 말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화장품공장이 들어섰다. 지금까지도 LG 화학, LG하우시스, LG이노텍, LG에너지솔루션, LG생활건강, LS산전 등은 지역경제의 대들보다. 또다른 변곡점은 2002년이다. 이해 '하이닉스 살리기 범도민 운동'이 전개됐다. 하이닉스 채권단이 매각을 위해 미국 마이크론사와 MOU를 맺었기 때문이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는 당시 한국을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을 첨단 기술이자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반도체 강국이라는 꿈은 물거품이 될 위기 속에서 하이닉스 반도체의 임직원 뿐만 아니라 충북 지역 경제인, 시민단체 등 도민 전반에 '매각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들의 목소리는 채권단과 재경부, 금감원과 중앙 정부에 전달됐고 결국 하이닉스반도체는 워크아웃 절차를 거쳐 회생할 수 있었다. 2012년 SK그룹의 인수 후에는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오늘날 SK하이닉스는 반도체 업계 세계 2위의 기업으로 국가 경제를 견인하고 있다. 

▲하이닉스가 개발한 176단 4D낸드기반 512GB TLC
▲하이닉스가 개발한 176단 4D낸드기반 512GB TLC

◇반도체·바이오, 미래를 준비하다
2002년은 충북산업의 미래가 시작된 해다. 하이닉스 반도체의 회생 뿐만 아니라 산업화의 주역이었던 청주산단에 오송과 오창이라는 두 날개를 더한 시기다. 이 해 준공식을 가진 오창과학산단에는 현재 굴지의 제약회사와 연구소 등이 입주해 있다. 같은해 오송에서는 국제바이오엑스포가 열렸다. 당시만 해도 바이오산업은 일반 대중들에게 생소한 분야였다. 일찌감치 바이오·제약산업에 눈을 돌린 충북은 2009년 첨단의료복합단지를 오송에 유치하는 데 성공한다. 대구 설치가 기정사실이던 이 사업에 청주가 뛰어들었고 치열한 유치전 끝에 대구와 오송이 반반씩 유치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종근당, 녹십자와 같은 중견 제약업체들은 오송으로 공장을 이전하거나 신설했다. 이같은 첨단기술산업의 육성은 코로나19의 위기 속에서 충북경제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반도체와 화학제품, 진단키트 등이 호조를 보이면서 세계교역량이 위축된 상황에서도 2020년 충북지역은 178억9500만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전국 452억달러 흑자 중 39.6%를 차지한다. 앞으로 전망도 밝다. 반도체는 슈퍼호황을 예고하고 있고  LG에너지솔루션의 이차전지산업도 유망하다. 식품의약품안전처와 질병관리청이 자리한 오송보건의료행정타운을 중심으로 한 바이오·화장품·제약 산업도 포스트 코로나 시대 충북경제를 견인할 분야로 전망된다.
/이용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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